1077년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문 앞에 3일간 무릎을 꿇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 철회를 간구한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이다. 황제의 굴욕이다.
1077년 1월 눈발이 휘날리는 이탈리아 북부 산지 카노사(Canossa) 성 앞에 한 젊은이가 3일째 맨발로 서 있었다. 옷차림은 수도자처럼 얇고 검소했고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던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권을 지키려고 교황에게 대항하며 결기를 보이던 젊은 권력자였다. 하지만 교황에게 파문당해 황제의 자리와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결국 교황의 용서를 구하려고 치욕을 무릅쓰고 추위 속에 떨며 서 있었다.
성안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는 세상의 악을 해결하려면 성직자 계급이 앞장서야 하고 세속의 군주들은 성직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대주교 임명권이었다.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궁정 신부를 독일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자 교황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임명을 강행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그리고 2개월 내 파문이 철회되지 않으면 황제 지위도 박탈한다고 경고했다. 하인리히 4세는 주변 사람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껴 사죄를 위해 교황을 찾았다. 그러나 교황은 3일 동안 하인리히 4세가 성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이 소문이 유럽 전체에 널리 퍼지기를 기다렸다. 본보기 삼아 교권을 강력히 세우려는 의도였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이 역사적 사건은 세계사에서 중세 시대 교권의 위세를 보이는 상징이 됐다. 교황은 군대를 보유하지 않아 무력으로 세속 군주를 직접 벌할 수는 없었지만, 신을 대행해 징계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파문은 교인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가장 엄중한 벌이었다.
파문은 천국을 갈 수 없게 되는 내세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사회적으로 단절돼,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시대는 천주교만 유일 종교로 인정받던 사회였으며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 군주보다 상층부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신자였다. 파문당한 사람과 교류하거나 협력하는 사람 역시 파문당하게 된다.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일종의 세컨더리 보이콧이 전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이긴 비결이다.
시대적 배경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가 마침내 결전에 나서는데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에 오르기 전부터 교회 개혁을 모토로 내걸었다. 교황이 된 후 첫 발표가 성직자들에게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독신생활을 요구하며 이를 어길 시 파문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에 대한 경고이고, 교회의 자기 혁신이며, 민중들의 지지를 업고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오 7세의 그 화답이기도 했다. 또 이 선언은 교황의 이후 행보에 커다란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 발표한 주교의 서임과 면직 그리고 소임지 이동권이 교황에 있다는 칙령은 현실적으로 대의와 명분을 뛰어넘는 조치였다. 이 칙령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체제와 전면적으로 대립하였다. 왜냐하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이 대부분 성직 제후, 즉 성직자이면서 제후였기 때문이다.
제후로서 당연히 황제의 영을 따라야 하는데, 이 칙령으로 졸지에 성직자라는 부캐 때문에 교황의 명령까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오토 1세의 꼼수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봉건 영주들과 달리 세습이 되지 않는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충성 맹세를 받으며 성직 제후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일부 제후들이 성직자의 면세권을 노리고 스스로 성직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후 상황에서 볼 때 그레고리오 7세가 현실을 너무 단순하게 재단했고, 너무 성급하게 의욕을 부렸다. 결국 황제와의 전선을 서둘러 달군게 된다.
교황의 이 칙령은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성직자였다가 제후가 된 자들이나 제후가 된 후 성직자를 겸한 자들이나 다들 교황의 독신 요구도 그렇지만 임면권이 교황에 있다는 칙령으로 갈팡질팡했다. 사실 더 당황한 자는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그는 거북의 등처럼 조각 난 신성로마제국을 다시 하나로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후들을 제압해야 했다. 그런데 성직 제후들의 서임권을 교황이 가져간다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만나야 했다.
하인리히 4세
여섯 살에 신성로마제국의 왕위에 오른다. 젊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섭정에 대신 나서지만,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 터라 왕권은 빠르게 약화하였고, 아버지가 어렵게 일군 제국은 어느새 제후들에 의해 다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는 쾰른 제후가 그를 납치해 어머니의 섭정마저 빼앗는다. 이런 우여곡절을 다 겪은 뒤 1065년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왕위를 되찾는다. 그러나 제국은 제후들에 의해 거북의 등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공부하기 위해 로마의 수도원에 들어가 훗날 교황이 되는 그레고리오 6세를 시봉했다. 이후 대립 교황과의 전쟁에서 노르만족 기사들을 직접 이끌고 참전해 큰 공을 세우며 교황청의 실세에 오른다.
1073년 전임 교황의 장례미사에서 군중들에 의해 교황으로 제청받아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된다.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되지 않으면, 우연히 일어나기 힘든, 이 전례 없는 프로세스를 거쳐 기어코 교황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