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5.4운동은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반봉건 반군벌 반제국주의 운동.
1919년 5월 4일. 이날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학생들이 북경 시내 13개 대학을 대표해서 천안문 광장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일이 산동반도에서 누리던 각종 특권을 일본에 이양하기로 한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세력있는 자들끼리 이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중국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중국은 1917년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유럽 전선에 공병대까지 파견했었다. 선전포고와 더불어 독일과의 모든 조약관계는 자동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승국의 입장이었던 중국이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른 승전국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영토를 포기해야 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으므로 중국 젊은이를 더욱 자극시켰다.
그러나 사태는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서구 열강이 일본의 참여를 끌어들이기 위해 중국에서의 각종 이권을 넘겨주기로 동의했으며, 이와 함께 과거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의 북양군벌(北洋軍閥) 사이에 밀약이 공개됨으로써 군벌들이 일본측의 그러한 요구에 이미 동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학생 시위는 삽시간에 중국 전역으로 번졌고 언론과 백성들도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북경 정부도 잘못을 인정하고 관련자를 파면했으며 내각도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1922년 9개국 공동조약으로 중국은 비로소 산동반도에 대한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