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것으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조준(趙浚) 등이 시행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당시는 불교가 성행한때였으므로 쉽게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근본으로삼은 조선시대에는 사당의 시행이 철저히 강요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당을 설치하지않은 사대부는 문책을 당하기도 하고, 또 이것이 시비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층에 일반화되었고 서인(庶人)들도 이에 따랐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대청 모퉁이나 기타 적당한 곳에 부설하였다. 사당에는 3년상을 마친 신주를 모시는데, 옛날에는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을 세워야 했다.
위치는 정침(正寢) 동편에 3칸으로 세우는데 앞에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섬돌 둘을 만들어 동쪽을조계(階), 서쪽을 서계(西階)라 하여 모두 3계단으로하였다. 사당 안에는 4감(龕)을 설치하여 4대조를 봉안하는데, 반드시 북단에 남향으로 하고, 서편부터 제1감이 고조고비(高祖考), 제2감이증조고비(曾祖考), 제3감이 조고비(祖考), 동편인 제4감이 고비(考)의 위(位)가 된다.
감 밖에는 휘장을 드리우며 각 위패마다 제사상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 쌍씩을 놓으며, 최존위(最尊位) 앞에는 향상(香床)을 놓되 그 위에 향로는 서쪽, 향합은 동쪽에 놓는다. 사당은 담을 쌓아 가리고 앞에 대문을 만든다. 신주는 가문에 따라서 4대 봉사, 3대 봉사, 2대 봉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