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미첼은 저명한 기자였다. 스미스 대학을 중퇴하고 '애틀랜타 저널'에 들어가 칼럼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발목을 다쳐 쉬고 있는 동안 남편에게서 "자신의 책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훗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가 되는 원고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결말 부분부터 쓰여졌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결론부터 기사를 쓰는 습관 때문이었다. 남북전쟁과 남군의 퇴각, 구체제의 붕괴와 수복 과정을 다룬 이 책을 완성하는 데는 9년이 걸렸다. 첫 장은 출판 직전까지 쓰여지지도 않았다.
미첼은 당초 이 원고를 출판할 생각이 없었다. 일부는 타자기로 쳐서 정돈해 뒀지만, 세탁물 용지 뒤편에 끼적거린 낙서 더미도 상당수였다. 1935년 가을 미첼이 맥밀란 출판사 부사장 해롤드 라트햄을 만날 때까지 원고들은 책상 서랍에, 책상 위에, 책장 구석에 쑤셔 넣어둔 상태였다. 그러나 라트햄을 소개해 준 친구가 “페기(미첼의 필명)가 소설을 쓴다는 건 말도 안돼”라고 비웃자 홧김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날 밤 미첼은 원고 뭉치를 들고 라트햄의 호텔로 찾아갔다. 라트햄은 그 자리에서 원고를 넣을 여행가방을 샀고,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봐 미첼에게 수표부터 보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초판은 1936년 6월 출판됐다. 미첼은 ‘5000부만 팔렸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해 여름 이 책은 하루에 5만부가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대성공이었다. 50만부, 100만부 판매 행진을 계속했다. 1939년 개봉한 영화는 미국 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으며, 아카데미 영화제 10개 부문을 석권했다.
그러나 소설의 성공이 행복을 보장해주진 못했다. 미첼은 그 뒤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왜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라는 것 자체가 풀타임 직업”이라며 “전화 받고, 인터뷰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초판 출간 후 타자기 앞에 앉을 시간이 전혀 없었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1949년 8월 집 근처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