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생어는 여성이 주도가 되어 임신과 출산여부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다. 생어 자신의 어린시절도 다산과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일랜드계의 석수장이였던 아버지와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11명의 자녀 6번째로 태어난 마가렛 생어는 16세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것은 과도한 출산과 가난으로 인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어 뉴욕의 빈민가에서 여성들을 돌보면서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목도한다.

1914년 마가렛 생어는 '산아제한평론' 발간하면서 적극적으로 산아 제한 운동에 나선다. 이 산아 제한 운동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조절할 수있는 권리를 획득하자는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동은 환영받지못했다. 특히 1873년 제정된 <풍속교란방지법>으로 그녀의 책은 독자들에게 우송되지도 못했다. 그 속에 게재된 피임법에 대한 글이 풍기문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마가렛 생어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1916년에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다. 많은 가난한 여성들이 그녀를 찾아와 피임법을 교육받고 처치를 받았다. 그러나 마가렛 생어는 공안 질서 방해죄로 체포되었다. 그녀가 체포될 진료소 밖에서 기다리던 많은 여성들이 ‘남은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울부짖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마가렛 생어는 이일로 재판에서 30일 노동형을 선고 받았지만, '성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 판결도 이끌어냈다. 이것은 제한적이나마 여성에게 피임의 권리를 부여한 첫 발걸음이 되었다.

이후 계속된 그녀의 투쟁은 결국 하나하나 결실을 하기 시작했다. 1921년미국산아제한연맹이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제1차 세계인구문제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이것으로 최초의 국제산아제한기구가 결성됐다. 보수적이었던 의학계도 점차 산아제한 운동에 참가 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에게무제한으로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법이 1939년 제정되었다.

1960년 마가렛 생어와 과학자들이 이루어낸 먹는 피임약 개발은 산아 제한운동에 획을 그었다. 이것은 불편하고 불완전한 피임법을 벗어나 편리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100% 피임을 보장했다. 여성들은 마침내 원치 않는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있었다. 경구용 피임약의 개발은 여성의사회적 진출과 활동을 더욱 앞당겼고 여권의 신장에도 몫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