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짧지만 낮은 온도(2~10도)에서 오랫동안 숙성시킨 맥주를 라거, 오랜 세월 인간의 입 맛을 사로잡았던 실내온도(18~21도)에서 발효시킨 맥주를 에일이라고 한다.
세계 맥주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는 라거는 탄산맛이 강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에일은 거품이 많고 강한 맛을 띠며 색도 진하다. 알코올 도수도 에일이 라거에 비해 높은 편이다.
또, 에일 효모가 섭씨 20도 정도의 상온에서 짧은 기간 발효를 끝내는 반면 라거 효모는 섭씨 10도 정도에서 오랜 기간 천천히 발효를 진행한다. 또한 에일 효모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향을 만들지만 라거 효모는 특별한 향을 만들지 않고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을 선사한다.
약 1만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태어난 에일이 인류 역사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온에서 발효하는 에일 효모 때문이었다. 19세기 파스퇴르가 이 작은 마법사의 존재와 능력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기 전까지, 무려 수 천년 간 에일 효모는 어둡고 미지근한 맥주를 만들었고 인간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에일이 쥐고 있던 권력은 삽시간에 사라진다. 에일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좌를 차지한 맥주는 라거였다. 15세기 얼음 덮인 알프스 산맥에서 우연히 발견된 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라거는 남미에서 우연히 유럽으로 온 효모가 에일 효모와 만나 변종이 되어 라거 맥주를 만드는 효모가 된 것이다.
그러나 라거는 에일과 차별화된 향미를 갖고 있지만 저온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가능했기에 많은 양을 만들 수도,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하기도 힘든 맥주였다. 하지만 에일이라는 견고한 둑은 19세기가 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신은 파스퇴르였다. 그는 맥주와 와인 연구를 통해 발효와 부패가 화학적인 현상이 아닌, 미생물이 만드는 현상임을 증명했다.
자본주의의 태동도 라거 발전에 힘을 보탰다. 긴 발효 시간과 냉장 시설은 라거의 생산 단가를 증가시켰지만, 이는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 효과로 상쇄될 수 있었다. 소비자의 수요가 점차 에일에서 라거로 옮겨가자 라거 양조 설비에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수익이 창출되는 시장으로 자본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1842년 최초의 황금색 라거인 필스너 우르켈이 나온 이후, 칼스버그, 라데베르거, 슈파텐 같은 밝은 색을 띠는 라거들이 줄줄이 탄생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맥주에 열광했다. 아름다운 황금색, 잡미가 없는 깔끔함, 그리고 시원한 목 넘김까지, 새로운 맥주 출현은 혁명이었고 순식간에 세상은 뒤집어졌다.
변화 발전 없이 수천 년 넘게 고인 물속에 있던 에일은 기술적 진보와 과학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기존의 패권을 잡고 있던 포터, 페일 에일, IPA, 브라운 에일은 투명하고 황금색 라거에 밀려 선반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1세기, 여전히 라거는 맥주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가 시작된 미국 또한 버드와이져를 비롯한 라거가 여전히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