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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한줄요약) 키레네 학파의 창시자(BC 435?~BC 355?)

그리스의 철학자. 북아프리카 키레네 출생. 소크라테스를 숭배하여 아테네로 건너가, 시칠리아섬의 궁정 등에서 생활한 뒤, 고향에서 키레네학파를 열었다. 그의 학설은, "인생의 목적은 개개의 쾌락이다. 행복은 과거·현재·미래의 개개 쾌락의 총화이다.

쾌락은 매끄러운 운동이고, 고통은 거친 운동이다. 육체적 쾌락이 정신적 쾌락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숭배하여 아테네로 건너가 시치릴아섬의 궁정 등에서 생활한 뒤 고향에서 키레네학파를 열었다.

자세히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의 많은 제자 중 한사람으로, 소피스트처럼 돈을 받고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욕을 먹었던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철학자들 중 그 성향이나 행동이 가장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되는데 한평생 쾌락론자로 살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스티포스는 아프리카 북부의 번영한 도시 키레네 출신으로 엠페도클레스가 죽은 해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435년에 태어났다. 키레네는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7세기에 세운 식민도시였다. 그는 청년기에 접어들자 멀리 아테네까지 유학을 와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당대의 유명인사들에게 배웠다.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열심히 쫒아다니며 철학을 배우는데에 힘썼다. 아리스티포스의 성품이나 특징을 보여주는 짤막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면서도 수업료를 받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받아넘겼다.

“스승님도 돈 많은 친구들에게 쌀이나 술 같은 것들을 받으시지 않습니까? 물론 먹고 살만큼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긴 하지만 말이에요. 게다가 스승님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아테네 최고급층 권력자들이란 말이지요. 그에 비하면 저는 제 돈을 주고 산 노예 하나뿐이란 말입니다.”

또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얻었는지 묻자, 그는 “스승님이 돈을 조금 얻었던 곳에서 저도 좀 얻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한번은 그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근처에 있던 섬의 해안가 착지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그 섬이 어떤 섬인지, 주민이 살기는 하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며 배를 동동 굴렀다.
 
아리스티포스는 침착하게 해안가를 둘러보다가 모래 위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희망이 있다. 인간의 흔적이 보인다” 나중에 그 섬은 로데스 섬으로 밝혀졌다. 그는 시칠리아 섬 시라쿠사의 부유한 참주였던 디오니시오스에게 가서 그의 궁전에 머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처음 디오니시오스에게 갔을 때 이 참주는 그에게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는 지혜가 필요했을 때는 소크라테스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필요하므로 폐하께 온 것입니다” 라고 황당한 대답을 했다.

이에 디오니시오스가, “부자들은 철학자를 찾지 않는데 철학자가 부유한 자를 찾아오는 건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고 다소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묻자 그는, “철학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지만 부자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날 디오니시오스는, “왕의 어전에 있는 나그네들은 모두 왕의 노예이다. 차라리 자유의 몸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소포클레스의 시를 인용해 말하였다. 그러자 아리스티포스는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시구를 인용해 “자유의 몸으로 온 자는 노예가 아니다” 라고 대꾸했다. 

하루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디오니시오스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디오니시오스는 그의 청을 들어주려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간청에도 묵묵부답이자 그는 마침내 이 참주의 발 밑에 엎드려 빌어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이 비굴한 태도를 두고 비웃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아리스티포스는 그에게, “부끄러워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귀가 발 밑에 달린 디오니시오스지.”하고 받아쳤다고한다.

한번은 디오니시오스의 신하에게 초대받아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아리스티포스를 안내하며 복도를 지나면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리스티포스는 갑자기 그 신하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가 깜짝 놀라 무척 화를 내자, 아리스티포스는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달리 마땅한 곳이 없어서요.” 소크라테스 밑에서 함께 배운 동문으로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플라톤이 디오니시오스에게 초대받아 왔다. 연회 자리에서 이 참주는 모든 사람에게 붉은 옷을 입고 춤을 추라고 명했다. 점잖은 철학자 플라톤은 ‘여인들의 옷은 차마 입을 수가 없구나.’라는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이용하여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리스티포스는 왕이 시킨대로 붉은 옷을 입고 춤추며,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시의 또 다른 부분을 인용해 ‘어진 여인은 주신(酒神)의 잔치에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라고 응수했다. (여기서 주신이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말하는데 그의 축제는 여자들이 광란의 춤을 추며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의 객으로 궁전에 머물며 사치를 누리던 아리스티포스를 꽤나 함부로 대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가 이 철학자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하지만 아리스티포스는 조금도 반발하지 않고 꾹 참아냈다. 나중에 그것에 대해 어떤 사람이 아리스티포스를 비난하자, 그는, “어부들은 좋은 생선을 잡기 위해 휘몰아치는 파도를 맞고도 잘 참아낸다. 나도 금은보화를 위해 술잔에서 튀는 거품 정도는 견뎌내야하지 않겠는가?” 하고 답했다.

그는 쾌락을 위해 돈을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이지 돈에 끌려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몇가지 전해진다. 여행 중에 배를 탈 일이 있었는데 항해 중 그는 자신이 탄 배가 해적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배의 난관에서 자기 돈을 세는 척하다가 바다에 던져버리고, “아이구, 내 돈!” 하며 통곡하는 연기를 했다. 훗날 그 일에 대해 누군가 묻자 그는 “돈 때문에 망하느니 돈이 나를 위해 없어져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여행 중에 그의 많은 돈을 운반하느라 노예가 낑낑대는 것을 보고, “네가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다 버리고 가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원만하고 활달하며 거침없는 행동은 그가 실천하며 살았던 철학 덕분일 것이다. 철학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겁내지 않고 누구와도 사귈 수 있는 능력이다.”고 답했고, 덧붙여 “교양 없는 자가 되느니 차라리 거지가 되겠다. 거지는 돈이 모자른 것이지만 교양 없는 자는 인간성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했다.

어느 날 유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야채를 냇물에 씻고 있다가 그 곁을 지나가는 아리스티포스를 보게 되었다(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연로한 제자로 알려진 안티스테네스에게 사사했다). 디오게네스는 그에게, “아리스티포스, 자네가 푸성귀에 맛을 들였더라면 귀족들 틈에 끼기 위해 그들 발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아리스티포스는 “디오게네스, 자네가 사람들과 교제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런 야채 따위를 먹고 살지는 않아도 되었을텐데.”하고 맞받아쳤다. 

그는 한 때 라이스라는 이름의 매력있는 매춘부와 동거를 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역시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이 살았던 집과 새집에 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많은 사람이 이용했던 배와 새로 지어진 배에 타는 것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많은 남자들과 어울렸던 여자와, 한번도 남자와 어울리지 않은 여자와 사는 것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하며 비난을 일축했다.  

아리스티포스는 훗날 자신의 고향 키레네로 돌아가 학교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키레네 학파의 시발점이다. 그의 쾌락론적 학설을 지지하며 따른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거침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쾌락론자였지만 쾌락의 노예는 아니었다. 자유로운 영혼이 이끄는 대로 막힘없이 살았을 뿐이다. 이 멋진 고대의 자유인이 죽은 시기는 기원전 356년경으로 추정될 뿐,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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