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7년 5월 13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국왕을 겸한 카를 6세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제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황가였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은 축복받을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 전해 아들인 레오폴트 요한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죽은 터였다.
황 카를 6세는 결과적으로는 딸 셋밖에 얻지 못하지만 아들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국가행정이나 법률·군사 제도, 정치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 아버지 카를 6세와 마찬가지로 마리아 테레지아도 일찍부터 음악과 춤, 연기 등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종종 현기증에 시달리는 등 건강 상태는 그리 양호하지 못해 부모의 걱정을 자아냈다. 장차 오스트리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은 전 유럽의 관심사였다. 왕가의 결혼은 영토의 합병으로 이어져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꾸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로트링엔(프랑스어로는 로렌) 대공국 왕자인 프란츠 슈테판이 신랑감으로 낙점됐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를 본 뒤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프란츠 슈테판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얻기 위해 로트링엔 통치권을 포기해야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둘은 1736년 화려한 예식과 함께 부부가 됐다. 부부는 무려 16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불행하게도 성인까지 성장한 건 아들 4명과 딸 6명뿐이었다.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장차 프랑스 국왕이 될 루이 왕자와 결혼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개명한다.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중시해 부르봉 왕가와 정략결혼을 추진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프랑스 왕궁에서 조신할 것을 신신당부했으나 딸은 곧 어머니의 조언을 잊어버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탐닉하게 된다.
이런 소식을 접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우둔한 행동'을 시정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딸은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 단두대에 서는 비극을 맞게 된다. 그나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다행한 점은 이 비극이 그의 사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1740년 10월 13일 사냥을 나갔다가 급격한 복통을 일으킨 아버지 카를 6세가 1주일만에 숨지자 23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73만㎢ 영토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왕국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당시 임신 3개월이었던 딸의 건강을 염려해 카를 6세는 자신의 장례식에 딸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는 즉각 주변국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의 영유권을 왕가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던 터여서 한 나라의 국왕이 사망하면 혼맥으로 복잡하게 얽힌 주변국들의 상속권 주장이 정치적 분쟁이나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에 대해 카를 알브레흐트 바이에른 선제후가 이의를 제기했고 프랑스, 에스파냐, 스웨덴, 덴마크, 사르데냐-피에몬테, 쾰른선제후국 등이 동조했다.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에 위협이 된 것은 훗날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리게 되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였다.
'필생의 라이벌'이라고 할 두 군주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독일 지역, 나아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두고 시작된 군사적 충돌은 점차 확대돼 1756년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가하는 국제전 성격의 '7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모두 더는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두 나라는 후베르투스베르크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을 종결한다. 일련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는 니더 및 오버슐레지엔, 글리츠백작령 등 상당한 영토를 잃었고 국제적 위상도 추락했다. 막대한 전쟁 경비를 갚을 길도 요원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의 계몽절대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의 재정이 튼튼해졌고 20만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갖춘 군사 강국으로 부상했다. 거듭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련의 개혁을 단행해 오스트리아를 근대 국가로 변모시켰다.
재상으로 하우크비츠를 등용해 귀족들의 조세동의권 제한, 중앙정부의 행정권 강화, 귀족 및 성직자들의 면세특권 폐지 등 귀족들의 특권을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밀어붙였다. 또 대법원을 설립하고 각 지방의 법률을 '테레지아 법전'으로 집대성해 법률을 일원화했다.
왕위 계승 전쟁의 패배를 교훈 삼아 군제도 개혁했다. 오스트리아는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귀족들과 영방군주들이 용병을 모집하거나 군대를 구성해 대항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영주 산하의 군대들은 무기체계와 지휘 방법이 제각각이어서 조직적인 작전 운용이 어려웠다.
일찍이 상비군 체제를 확립해 평소 고강도 훈련을 받은 프로이센 군대에 맥없이 패한 이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 지도자 다운 백작에게 전국 규모의 상비군 창설, 복무규정과 훈련세칙 마련, 평민 출신도 입학할 수 있는 사관학교 창설 등 군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스스로 군대 야영훈련에 매년 참가해 강인한 군대의 구축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의사이자 계몽주의자인 스비텐을 기용해 교육 개혁도 추진했다. 학교법을 제정해 오스트리아 왕국 전역에 초급학교 및 중급학교를 설립했고 교회가 가졌던 교육 독점권을 박탈해 대학을 국가기관으로 만들었다. 빈 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하고 각국에서 유능한 의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의사자격시험 근간도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이 성과를 내면서 국가재정은 건실해졌고 국정이 전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러한 재정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역대 국왕들이 추진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한 쇤부른 궁전의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에 나서 1749년에 완공했다. 1천441개 방과 390개 홀, 149개 부엌을 갖춘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바로크 양식의 쇤부른 궁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과 그의 가족들에게 걸맞은' 왕궁이었다.
1765년 8월 사랑하던 남편이 궁중에서 쓰러진 후 바로 사망하자 크게 상심한 48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는 이제 행복한 시절과 고별하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긴 머리칼을 자르고 화려한 옷과 보석을 모두 딸들과 궁정의 여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후 죽을 때까지 오로지 턱까지 묶은 검정 모자에 검은 미망인 옷만 입고 살았다.
1780년 11월 초 개방마차를 타고 쇤부르크 궁전을 돌다 강한 비를 맞은 테레지아는 오한을 느끼고 자리에 드러누운 후 내내 회복되지 못했다. 11월 28일 아들이자 공동통치자인 요제프 2세에게 "신민의 복지와 빈자에 대한 지원에 특히 신경 써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뒀다.
그의 충만한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사랑하고 찬미한 빈 시민과 오스트리아 왕국 신민 모두는 어머니이자 통치자였던 여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같은 해에 왕위에 올라 일평생 그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여왕은 오스트리아 왕국과 합스부르크에 큰 영예를 남겼다"면서 "여왕과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고 추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