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나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민간선박을 말한다. 사략선 해적은 적국의 함선과 해외 근거지를 약탈해 얻은 수익을 국가와 나누는 대신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일종의 비공식적 공생관계였다.
사략선의 기원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널리 퍼진 건 대항해시대로 자국의 민간 선박이 적국 함선의 공격에 화물 등이 털려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측에서 사략면장(Letter of Marque을 발급해 적의 배를 공격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처럼 ‘사략선’이라는 단어가 정립된 것은 17세기 무렵이다. 하지만 사략행위는 17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절(1558~1603) 가장 유명한 선장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다. 1580년대에 시작한 에스파냐-영국 전쟁에서 드레이크 경은 사략선을 몰아 스페인 선박을 격파하는 등 수 많은 공적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사략선은 민간에게 사략허가증을 내주고 노략을 허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히 정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사략허가증을 내줄 때의 조건은 본국과 ‘적국’인 배만을 약탈할 것이며 중립국과 동맹국의 상선은 사략은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하지만 해군이 일일이 사략선의 불법행위를 감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자행되는 사략행위는 적국, 중립국, 동맹국 할 것 없이 자행되었다. 또한 사략선은 국가와 계약한 영업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허가기간이 지난 후 하는 노략행위는 해적으로 간주 해사법정에서 처벌받았다.
영국 해군은 원래 스페인제국 상선을 약탈하던 사략선에서 출발했다. 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도약했으며, 1805년 프랑스와 벌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제해권을 거머쥐게 됐다. 1900년까지 영국은 나머지 나라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선박 톤수를 보유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가장 우위에 서있는 해상무역의 강자였기 때문에 새로 발을 디딘 영국의 입장에서는 에스파냐가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무적함대라고 불렸던 에스파냐의 해군과 맞붙기엔 영국해군이 아직 체계가 불안정했던 상태였다.
정면전쟁은 승산이 희미했기 때문에 영국은 사략선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스페인으로 공급되는 상선을 나포해 공급품을 약탈하는 것이 상당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략선이 활개를 치게 되자 에스파냐 측에서도 상선을 호위하는 해군군단체제 ‘플로타(flota)’를 고안해낸다.
사략선의 전성기를 맞은 16~18세기는 항상 열강들이 해군이 호위하는 상선체제를 고안했지만 작고 빠른 사략선의 표적범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해군의 군사력낭비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호위를 줄이는 등 효과적인 사략선의 대응책이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유형은 다음세기에 프랑스와 미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해군전력을 사략선을 이용해 충당하는 것과 같다. 정부와 사략선 간의 긴밀한 이해관계란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의 주요 국가는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략 해적은 영국 해군에 고용되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박연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의 장교였다가 표류해 조선에 귀화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