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단과 7정에 관한 이기론적 해석 4단과 7정을 구분해서 보는 견해는 조선 초 권근의 입학도설 중 '天人心性合一之圖(천인심합일지도)'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권근은 '性은 理에서 근원한다. '고 보아 4단을 정이라 하였고, 7정은 '기에서 근원한다.
'고보아 心자밑에 횡렬해 놓았다. 그러나 4단과 7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정지운의 '天命圖'를 이황이 수정 개작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지운은 '천명도'에 여러 번의 수정을 하였는데, 이황이 1553년 정지운과 논의 끝에 '4단은 이에서 발생한 것이고[4端發於理] 7정은 기에서 발생한 것[7情發於氣]이라고 수정하였다.
이것이 정지운의 新圖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2년 후 숙고 끝에 다시 '4단은 이의 발현이고[4端理之發] 7정은 기의 발현[7情氣之發]이라 고쳤다. 그로부터 4년 후 1559년, 기대승이 이황의 4단7정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이황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시 4단7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4단7정 논쟁의 시작이었다.
기대승은 성리학 용어의 개념적 전제에 의거, 이황의 해석에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비판적 반론을 제기했다. 기대승은 우선 4단과 7정이 구별되는 것은 그것들이 다만 부분적인 정이냐 전체적인 정이냐의 차이에 따라 판별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즉, 인간의 '정 전체인 7정중에서 선의 측면에서 발로된 정들만을 가려 뽑은 것이 4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4단은 7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4단과 7정을 대립작인 별개의 것들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와 기 역시 의미상으로는 구별되지만, 그 실제적 관계에 있어서는 구체적 사물 가운데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적 사물에 입각하여 볼 때,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의 해석은 이와달리 이기를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기대승은 실제 작용하는 것은 오직 기밖에 없으므로 기의 작용이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경우가 선이요,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되었을 때가 악이라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의 본체가 선'이라든가, '선이 이의 본연' 이라든가 하는 것도 기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게 작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이나 이의 본체가 기의 작용을 떠나 고려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황의 해석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4단과 7정은 기대승의 지적대로 우선 그 의미들이 달라서 4단은 선한 정인데 비해 7정은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므로, 양자를 대비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또 이와 기 역시 의미가 다르게 분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에 대한 분별적 해석 역시 불가능할 것은 없다는 입장에 섰다. 이황은 특히 4단7정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것들이 의미의 차이뿐 아니라 그 발로되는 유래의 차이 때문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4단과7정의 발로 현상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4단은 性으로부터 발로되는 것인 데 비해, 7정은 감각 기관이 바깥 사물과 감촉한 후에 발로된다는 것이다. 4단과 7정이 이와 기가 합해져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4단의 경우에는 이만으로, 7정 경우에는 기만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은 마치 性에 있어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부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대승은 맹자의 본질에 입각해서 4단은 '이에서 발하여 선하기만 한 것'을 의미하므로 이만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7정의 경우에는 중용에도 나와 있듯이 이기를 겸한 것, 즉 선악을 다 함유한 것을 의미한 것이기에 기만으로 표시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情은 性이 발로된 것 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7정 역시 性의 발로, 곧 이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결국 4단과 7정의 관계는 '실제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있기에 이들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반론을 받은 이황은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하였다. 우선 7정을 선악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했던 것에서 '본래는 선하지만 악으로 변하기 쉬운 것' 이라 하였으며, 4단과 7정의 발생 근원에 있어서도 4다 역시 7정과 마찬가지로 바깥 사물과 접촉이 있어야 하며, 7정 역시 사물과의 감촉뿐 아니라 이와의 관련 속에서 발생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4단과 7정에는 서로 같은 점 이외에 다른 점도 있다. 그 다른 점들은 곧 이를 위주로 하는가 기를 위주로 하는가에 따라 구별되고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의미상 '7정의 기에 대한 관계는 4단의 이에 대한 관계와 같다. '고 하는 것이다. 이황은 이를 요약하여 '4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이다[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라고 하였다.
기대승은 이황의 수정 해석 역시 부인하여, 4단과 7정이 모두 이와 기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4단의 경우 맹자의 본래 의도를 따르면 '이의 발' 이라 할 수 있고, 7정 역시 이기가 합해져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기이기에 '기의 발' 이라 해석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이 끝난 지 6년 후 1572년 성혼이 이이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 타당성을 물었는데, 이 때 성혼은 38세, 이이는 37세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두사람간에 66여 년간 아홉 차례의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성혼은 이황의 뜻을 그 기본 의도에 입각해서 일단 긍정하였는데, 그것은 주희가 심의 허영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이지만 인심과 도심으로 각각 구분하여,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긴 것이고 도심은 性命의 正에서 근원한 것과 상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과연 인심·도심의 구분과 4단·7정의 구분이 서로 대응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이 문제에 대해 성혼은 4단7정은 성에서 발하고, 인심 도심은 심에서 발한 것이어서 발원처는 다르지만, 이미 성현의 말에 모두 주리, 주기의 설이 있으니 4단7정을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7한것'이라해도무방하지 않겠는가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4단7정과 인심, 도심은 서로 분명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7정이란 인심의 움직임에 입곱 가지가 있음을 합해서 말한 것이고, 4단은 7정 중의 선한 쪽만을 택하여 말한 것이어서, 이들 간의 관계는 인심, 도심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4단7정은 오히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별과 같은데,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지만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어서, 4단의 7정에 대한 포함 관계와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성혼과 이이의 4단7정에 대한 논변은 앞선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과는 달리, 그들 간의 포함 관계를 기준으로 진행되면서 그것이 인심, 도심과의 대응 관계를 관건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개념 규정에 치중하는 양상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