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마가렛 히긴스는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성품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1차 대전 때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의 부친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젊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고, 매기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될 때까지 매기는 불어와 중국어만을 할 줄 알았다. 그 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대학에서 1942년까지 공부했다. 대학 시절 그녀는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화재피해 전문 리포터로 활동했다.
1944년 그녀는 <트리뷴>지 런던 지국으로 발령받았고, 미군이 독일 튀링엔 주의 부헨발트를 점령할 때 처음으로 전쟁기사를 쓰게 되었다. 한 명의 동료와 함께 기자로서는 최초로 다하우에 진입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1947년, 매기는 <트리뷴>지의 베를린 지국장을 맡게 되었다. 미 점령군 사령관 루셔스 D. 클레이와 그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이 막역한 사이 덕택에 그녀는 항상 가장 빠르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때로 매정한 성미를 보여 그녀는 몇 명의 동료기자들과 적대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1950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소속 도쿄 특파원이었던 그녀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소식을 접하고 6월27일 한국 땅을 밟아 전선을 누볐다. 그녀는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출판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전쟁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후 히긴스는 새로운 분쟁지역으로 부각되었던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특히 그녀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심층 취재로 당시 미국 정부의 미움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그녀는 라오스에서 풍토병을 얻게 되어 고생하다가, 1966년 1월 3일 45년 남짓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2010년 8월,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히긴스의 딸 린다 밴더블릭(51) 박사와 손자를 초청해 마가렛 히긴스의 희생과 용맹, 그리고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외교훈장 흥인장(2등급)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