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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바스코 가마[Vasco da Gama]
(한줄요약) 포르투갈의 항해자. (1469년 ~ 1524년)

1497년에 포르투갈 왕의 원조로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여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1524년에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에 임명되었다.

서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뱃길, 곧 인도 항로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는 1497년 7월 네 척의 선대(船隊)를 이끌고 리스본을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돈 뒤 이듬해 5월22일 인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인도 항로를 개척하려는 포르투갈인들의 70년 노력을 마무리했다.

인도 항로는 1869년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단 항로였다. 바스코 가마는 조국으로 되돌아오며 괴혈병과 열병 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어야 했지만, 1499년 9월 리스본에 도착해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국왕 마누엘1세는 그에게 연금과 함께 귀족 작위를 내렸다.

항로 개척 이후 해마다 확대되던 인도 무역이 포르투갈 상인과 현지인과의 마찰로 곤경에 빠지자 바스코 가마는 1502년 15척의 함대를 이끌고 다시 인도로 향했다. 소팔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포르투갈 상관(商館)을 설치하며 인도에 다다른 바스코 가마 일행은 이슬람ㆍ힌두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코친, 카나놀 등 인도 각지에도 상관을 설치해 포르투갈이 상당 기간 인도 무역을 독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524년 포르투갈령 인도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됐고, 그 해 현지에서 병사했다. 바스코 가마가 묻힌 코친은 포르투갈에 이어 영국ㆍ네덜란드 등으로 주인이 바뀌며 동서 무역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바스코 가마의 아들 에스테방 가마와 크리스토방 가마도 탐험가였다. 에스테방은 아버지가 죽은 해인 1524년 인도 원정에 나서 말라카와 고아의 총독을 차례로 지냈다. 크리스토방은 형 에스테방과 함께 참가한 아비시니아 원정에서 이슬람교도에게 살해됐다.

포르투갈의 역사는 16세기의 두 마리의 사자 잉글랜드와 에스파니아의 싸움에 밀려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양 교역과 탐험의 첫 발을 디딘 국가는 다름아닌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항해왕'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 엔리케 왕자가 등장하면서 당시 중해가 이탈리아의 여러 군소국에 장악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지중해가 아닌 다른 항로의 개척이었다.

그리고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기독교국 "프레스터 존"왕국과 동맹을 맺어 오스만 투르크를 제압하려는 종교적, 외교적인 목적도 혼재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모험가들인 바스코 가마(Vasco da Gama),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등은 새로운 무역루트를 개척하여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인도, 말레이시아, 페르시아만, 중국, 브라질, 아프리카에까지 미치게 된다. 막대한 식민지와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포르투갈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먼저 해외로 눈을 돌린 국가였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 남미 브라질에 도달한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은 15∼16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大航海) 시대를 연 주역들이었다.

포르투갈의 최대 관심사는 아시아였다. 디아스와 카브랄 탐험의 원래 목표도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시아 항로 개척의 꿈은 바스코 가마(1469∼1524)가 실현했다. 배 4척을 이끌고 포르투갈을 출발한 그는 아프리카 해안을 둘러가는 항법을 써서 1498년 5월 18일 인도에 도착했다.

이 길은 1869년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기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단 항로였다. 인도 항로가 열리자 유럽인들은 신천지가 열린 듯 기뻐했다. 이보다 6년 앞서 스페인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열광적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 당장 유럽에 별다른 경제적 효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인도 항로 개척은 동서 직교역을 가능하게 해 줬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양 향료, 도자기, 보석에 대한 수요가 넘쳐났지만 1453년 비잔틴제국을 몰락시키며 아시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린 오스만튀르크 때문에 수입이 쉽지 않았다.

동양 물건들이 바닷길을 통해 대량 유입되면서 상품 가격이 떨어졌고 이는 유럽인의 경제생활을 변화시켜 후일 산업혁명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시아로서는 인도 항로 개척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동양이 군사적으로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은 총과 칼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을 잠식했다.

바스코 다가마의 업적
선원 170명 중 생환자 54명, 선박 4척 중 2척 상실. 2년2개월 동안 항해를 마치고 귀환(1499년)한 포르투갈 함대의 성적이다. 겨우 살아 돌아온 이들은 크게 환영 받았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훗날 저술된 ‘국부론(1776년)’에서 이들의 항해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두 가지 중 하나’라고 꼽았다.

인원과 장비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도 환대 받았던 것은 ‘인도 항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스코 가마(Vasco da Gama)가 이끌었던 포르투갈 함대는 거지꼴이었지만 싣고 온 후추로 60배의 수익을 거둬 유럽인들을 꿈에 부풀게 만들었다.

인도 직항로 발견은 ‘서구가 지배하는 세계무역’ 시대를 열었다. 산업혁명의 기운도 이때부터 싹텄다. 후추 같은 향신료뿐 아니라 인도산 면이 유럽을 휩쓸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영국 면직물 산업의 기계화와 동력화가 이뤄졌다. 서구 여러 나라가 신대륙에서 적극적으로 광산을 개발했던 이유도 무역대금으로 인도에 지불할 금과 은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교역 초기 막대한 흑자를 기록하던 인도는 얼마 안 지나 쇠퇴하고 면직물조차 유럽 제품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현실에 만족한 탓이다. 자만은 세계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라의 국부와 자양분ㆍ국권까지 고스란히 서구로 넘어가는 결과를 빚었다.

동양보다 뒤졌던 서구는 어떻게 중심에 설 수 있게 됐을까. 끊임없는 도전 덕이다. 가마도 아버지와 동생ㆍ조카를 모두 바다에서 잃었다. 가마 자신도 1524년 12월24일, 인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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