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이란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 요지.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을 말한다.
서북 방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經略)은 고려 말에 상당한 진척을 보여 강 하류인 서북 방면은 거의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은 더욱 진척되어, 1401년(태종 1)공민왕 때 설치한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강계부로 승격시키고, 1413년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갑산군(甲山郡)으로 개칭하였다.
1416년 갑산군의 일부를 분리하여 지금의 자강도(慈江道) 중강군(中江郡)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고, 이듬해 이를 평안도에 이관(移管)하여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남안(南岸)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되었다.
그러나 세종 때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1433년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無)로 삼아 황해도·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으로 이를 정벌케 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 지방이 여연·강계와도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위급한 때에 대비하기 어렵다고 하여, 같은 해 두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자작리(慈作里;지금의 慈城郡)에 성을 쌓고 이곳에 자성군을 두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여진족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437년(세종 19) 평안도도절제사 이천으로 하여금 재차 토발케 하여 오라산성〔兀刺山城〕·오미부(吾彌部) 등 여진족의 근거지를 소탕한 다음, 1540년 여연군 동방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1542년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여연·자성의 중간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사군의 설치를 보게 되어 동북의 육진(六鎭)과 아울러 조선의 북경(北境)은 두만강·압록강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북계(北界)의 개척 사업은 그 유지·확보가 쉽지 않아 조정에서 점차 사군을 철폐하자는 논의가 일었는데, 1455년(단종 3)에 이르러 여연·무창·우예 3군을 폐하고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부(龜城府)로 이주시켰다.
1459년(세조 5) 자성군마저 폐하고 주민을 강계부로 이주시킴으로써, 4군은 철폐되고 이지역은 오랫동안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리게 되었다.